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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이 만드는 새로운 고통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고통이다.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 고통까지 모든 형태의 괴로움을 피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회피하려는 노력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이 만드는 새로운 고통

 

 

회피의 심리학: 왜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는가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고통을 경고 신호로 받아들이도록 진화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쾌락 원칙'에 따르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생존 메커니즘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을 쾌락 원칙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현실 원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즉시적인 만족이나 고통 회피만을 추구하면,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 인지행동치료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제시한다. 단기적인 회피 행동이 장기적으로는 불안과 우울을 악화시킨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회적 상황을 피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불안감을 줄일 수 있지만, 결국 사회적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동양 철학이 말하는 고통의 본질

불교에서는 고통을 인생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본다. 부처가 깨달은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가 바로 '고성제(苦聖諦)'다. 모든 존재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가 말하는 고통의 원인은 외부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회피에 있다.

불교 철학에서 '탐진치(貪瞋癡)'라고 부르는 세 가지 독은 모두 고통 회피와 관련이 있다. 탐욕은 즐거움을 붙잡으려는 욕구이고, 성냄은 불쾌한 것을 밀어내려는 충동이며, 어리석음은 이 둘의 무의미함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다.

 

도교에서도 비슷한 통찰을 제공한다. 노자는 "화복이 서로 의존한다"라고 말했다. 행복과 불행, 고통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만을 일방적으로 피하려는 시도는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고통의 의미

서양 철학의 실존주의자들은 고통을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으로 본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서 오는 필연적 감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며, 이를 피하려 하면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잃게 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 조건을 설명했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불안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려 하면, '비본래적 존재'가 되어 군중 속에 매몰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선택의 부담과 그에 따른 책임감은 고통스럽지만, 이를 피하려 하면 '자기기만'에 빠진다고 보았다. 타인이나 상황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이 밝힌 회피의 역설

수용전념치료(ACT)의 창시자인 스티븐 헤이즈는 '경험적 회피'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불쾌한 감정이나 생각, 신체 감각을 피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것들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마치 "분홍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라고 하면 더욱 분홍코끼리가 생각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억압하려 할수록 그 감정은 더욱 강해진다. 이를 '아이러닉 프로세스 이론'이라고 부른다. 뇌는 특정 생각이나 감정을 모니터링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것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또한 회피 행동은 학습된 무력감을 만들어낸다. 셀리그만의 연구에 따르면,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실제로는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도 포기하게 된다.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회피 문화

현대 사회는 '회피 문화'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소비주의 문화는 즉각적인 만족과 불편함의 제거를 약속한다. 광고들은 끊임없이 "더 편하게", "더 쉽게", "고통 없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하고, 타인의 행복한 순간들만을 본다. 이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운 고통조차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성'의 특징 중 하나도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피하려는 경향이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임시적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깊이 있는 관계나 지속적인 노력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회피가 오히려 더 큰 불안과 공허감을 만들어낸다.

 

 

 

고통 수용의 지혜

진정한 해법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르다.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마음 챙김 명상에서 가르치는 '관찰자 의식'이 좋은 예다.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판단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단순히 관찰한다. "지금 슬픔이 일어나고 있구나",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구나"라고 인식만 할 뿐이다.

 

스토아 철학의 '프로소체 선택'도 유용한 개념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했다. 외부 상황은 통제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의 기회로서의 고통

고통은 단순히 견뎌야 할 것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외상 후 성장'이 좋은 예다. 큰 어려움을 겪은 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하고 지혜로워지는 현상이다.

 

니체가 말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의미치료'를 발전시켰다. 그는 고통 자체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고 했다. 의미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장의 동력이 된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

고통 수용은 거창한 철학적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불편한 감정이 일어났을 때 즉시 딴생각을 하거나 무언가로 기분을 전환하려 하지 말고, 잠시 그 감정과 함께 있어보는 것이다.

 

신체적 불편함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아픔이나 피로감을 느낄 때 곧바로 약을 먹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연습을 할 수 있다.

 

대인관계에서도 어색함이나 갈등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 진정한 소통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불편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깊이 있는 관계를 만들어간다.

 

 

 

고통과 함께 사는 지혜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 자체는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고통을 무조건 회피하려 할 때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만들어낸다. 진정한 지혜는 피할 수 있는 고통과 받아들여야 할 고통을 구분하는 것이다.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고통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무수한 회피의 유혹에 맞서, 고통과 함께 사는 용기를 기를 필요가 있다. 이는 고통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고통까지 불필요하게 증폭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성숙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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