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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용서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상처를 준 타인을 용서하는 것도 힘들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용서란 단순히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용서란 무엇이며, 철학과 심리학은 이에 대해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용서의 본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용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것이 상대방의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된 용서는 오히려 그 반대다. 잘못이 분명히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잘못으로 인한 원한과 분노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용서를 덕(virtue)의 하나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무조건적인 관용이 오히려 덕이 아닐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정의로운 분노와 무분별한 관용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본 것이다.

 

현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으로 표현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때만 진정한 용서가 성립한다는 역설적 통찰이다.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작은 실수들은 사실 용서가 필요하지 않다. 진정한 용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다.

 

 

 

타인에 대한 용서: 관계의 회복인가 개인의 해방인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용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한다. 하나는 관계의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내적 해방이다.

 

기독교 윤리학에서 용서는 사랑의 최고 형태로 여겨진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용서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변화와 상관없이, 용서하는 사람의 일방적 결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기독교적 용서 개념을 '약자의 도덕'이라고 비판했다. 진정한 강자는 복수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지, 복수할 능력이 없어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보았다. 이는 용서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인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용서를 '원한을 놓아주는 과정'으로 본다. 로버트 엔라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진정한 용서는 네 단계를 거친다.

첫째, 분노와 상처를 인정하는 단계.

둘째,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는 단계.

셋째,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단계.

넷째,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단계다.

 

용서가 반드시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때로는 용서하면서도 관계를 끝내는 것이 더 건강할 수 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용서: 가장 어려운 과제

타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판사가 된다. 과거의 실수, 잘못된 선택, 놓친 기회들을 끊임없이 되짚으며 자신을 괴롭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과거 죄악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용서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자기 용서는 신적 용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기 용서를 '진정성의 회복'으로 본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상황에 태어나고,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의 선택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이 인간의 자유다.

 

하이데거의 '양심의 소리' 개념도 자기 용서와 연관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과거의 '비본래적' 선택들로부터 벗어나 '본래적'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용서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다.

 

심리학에서 자기 용서는 정신 건강의 핵심 요소로 여겨진다. 크리스틴 네프가 연구한 '자기 연민'(self-compassion) 개념이 대표적이다. 자기 연민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자기 친절, 공통된 인간성의 인식, 마음 챙김이다. 자신의 실수와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경험임을 받아들이고, 현재 순간에 머무르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와 용서

불교에서는 용서를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자비'(慈悲)와 '무아'(無我)의 개념을 통해 용서와 비슷한 경지를 설명한다.

자비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는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입혔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자비가 생긴다.

 

무아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할 고정된 '나'도, 용서받을 고정된 '상대방'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생멸한다. 상처를 준 '그 사람'도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상처받은 '나'도 이미 변화했다. 이런 무상(無常)의 이해가 자연스러운 '용서' 상태로 이끈다.

 

달라이 라마는 "분노는 타인을 해치려고 뜨거운 석탄을 집는 것과 같다. 결국 자신이 화상을 입는다"라고 말했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해방이라는 것이다.

 

 

 

이슬람과 유대교의 용서 개념

이슬람에서 용서는 '아프와'(Afwa)라고 불린다. 꾸란에서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자에게는 알라로부터 보상이 있다"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슬람의 용서는 정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보복할 권리가 있으면서도 용서하는 것을 더 높은 덕목으로 본다.

 

유대교에서는 '테슈바'(Teshuvah), 즉 '회개'와 연결해서 용서를 이해한다.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진심 어린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기독교의 일방적 용서와는 다른 관점이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도 자기 용서에 대해서는 다른 접근을 한다. 매년 욤 키푸르(속죄일)에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것은 자기 용서의 종교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 집단적 용서와 화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역사적 차원의 용서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독일의 홀로코스트 사죄,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 등이 그 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용서를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행위로 보았다. 과거의 행위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이 용서의 정치적 의미다.

 

하지만 집단적 용서는 더욱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용서할 권리가 있는가? 망자를 대신해서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가 정의를 대신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개인적 용서와는 다른 차원의 고민을 요구한다.

 

 

 

현대 심리치료에서의 용서

현대 심리치료에서 용서는 치유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된다. 특히 트라우마 치료에서 용서는 핵심적 과정이다.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용서를 인지적 재구성의 과정으로 본다. 상처를 준 상대방에 대한 왜곡된 사고를 교정하고, 상황을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돕는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용서를 '애도'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상실된 관계나 상처받은 자아에 대한 애도를 통해,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긍정심리학에서는 용서를 성격 강점 중 하나로 본다. 용서하는 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더 높은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용서의 한계와 비판

하지만 용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위험할 수 있다. 용서를 강요받는 피해자들, 용서라는 이름으로 정의가 무시되는 상황들이 그 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들은 여성들에게 용서가 강요되는 문화를 비판한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또한 성급한 자기 용서는 책임 회피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성찰하지 않고 쉽게 용서해 버리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는 '용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어떤 행위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용서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 용서의 기술

그렇다면 일상에서 용서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먼저 용서가 과정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분노, 상처, 배신감 등을 억압하지 말고 충분히 느껴보는 것이다. 감정을 부정하면서는 진정한 용서가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본다. 이는 상대방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용서의 경우, 자신에게 친구에게 하듯 친절하게 말해보는 연습이 도움이 된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모든 인간은 실수를 해"와 같은 위로의 말을 자신에게도 해보는 것이다.

 

 

 

결론: 용서는 선택이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다. 때로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더 건강한 선택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한과 분노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약함이 아니라 강함의 표현이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용기다. 타인을 용서하든 자신을 용서하든, 그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용서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용서를 향한 작은 걸음들이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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